권세와 위엄을 줄여 권위라 한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고 혼자 살아서도 않된다.
이는 하나님이 배필을 만들어 주신 이유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
라는 말로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사람이 혼자 있다는 것은 사랑할 대상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삼위 일체의 하나님은 사람도 사랑의 삼각(?) 관계를 완성코져 하신것이 아닐까?
아담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와를 사랑하고 하와는 하나님과 하와를 사랑한다면
완벽한 하나님의 속성 즉 삼위일체의 복사판이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러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의 명령을 사람이 잘 실천하기를 기대 하셨을 것이다.
이러한 명령을 잘 수행 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능력을 부여하셨는데 그것이 곧 권위 인것이다.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짓게 하시므로 그 권위를 부여하신 것이다.
권위(權威)의 뜻은 "남을 감독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또는
"타인(피조물)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권위가 갖는 능력이 크면 클 수록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 폐해 또한 크게 된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권위" 라는 것을 나쁘게 이용하여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우리는
수 도 없이 목격하고 경험해 왔다.
원시적(또는 야만적) 권위는 아무런 노력 없이 완성되는 것이였다.
고대의 사회에서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남자라는 이유 만으로 얻은 권위는 논리적으로 권위형성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까닭에
폭력을 동반하여 권위를 강요하는 폐해를 낳게 했다.
이러한 원시적인 권위는 후진적 사회 일수록 만연하고 그 강도가 심하다.
이런 악습은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는데,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에게 허락 되지 않은 직분(직위)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봉건적인 신분계급 또한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권위가 아닌 부모 또는 집안이 권위 형성의
주요 요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직도 어느 나라든 명문가가 존재한다.
명문가 출신이 권력 또는 재력을 소유하게 되면 당연한 듯 그 사회에 수용되지만,
비 명문가, 소위 근본 없는(?) 집안 출신이 권력 또는 재력을 얻으면 갖은 비방과 모함 그리고
방해, 심지어는 위협까지 가하는 사례는 결코 적지 않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이 권위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게 되는데, 문명화 될 수록
태어나면서 부터 자신의 의지 노력과는 관계없이 주어지는 권위는 사라지게 되고,
점차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것에 대한 권위가 인정되는 사회로 변화 된다.
공부또는 연구를 통하여 얻는 지식적 권위, 조직사회에서 노력을 통하여 얻은 직위,
또는 사업적 성공으로 얻어진 경제적 풍요 또한 권위를 인정 받게 된다.
물론 불법 또는 편법을 통해 얻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언젠가 그 권위 획득의 경위가 밝혀지면
곧바로 권위의 몰락은 물론 수치가 뒤따르게 된다.
하지만 이런 권위들은 인간사회가 필요 또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생성되고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인정은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반감과 불복하려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다.
권위의 사용 목적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어쩔수 없이 인정하는 권위가 아닌 그 권위에 굴복 하면서도 기쁜 권위는 없을까?
하나님도 이런 권위의 폐해에 대하여 염려 하시고, 영적인 세계에서 권위는 반드시 이것을
통해서만 생기도록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희생)"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권위의 존재는 바로 예수님 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거나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예수님은 교회에서 이렇게 절대적 권위의 존재가 되었을까?
하나님의 독생자?
구원의 구세주?
교회의 창시자?
틀린말은 절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 있는 것이 출생, 양육, 가족을 이룸, 으로만
규정하기에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
수 많은 부모들이 위의 조건을 충족하지만 그 모든 부모들이
자녀에게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 더해져야 비로소 모두가 인정하고 승복하는 권위가 완성된다.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의 배경은 무엇보다 "희생 하심"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 된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교회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희생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였을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희생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존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의인 또한, 인류애 즉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랑해야 할 수있는 희생으로 완성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이다.
사랑하는것과 권위를 갖는것은 서로 우선적 위치에 있지 않다.
굳이 권위를 얻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고 따르는 권위가 절로 나타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따르고 추종하는 경우가 없듯 그 권위를 인정치 않는 이치인 것이다.
"모든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4)
누군가가 타인으로 부터 원망과 시비가 없이 일 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일컬어 "훌륭한 사람"
이라 칭하며 무슨일에든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말 처럼 쉬운일은 결코 아니다.
모두를 결과로 만족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 일을 행한 선한 의도와 과정중의 자기 희생을 알게 될 때, 결과에 관계없이 인정이 되는 것이다.
모든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모든 일을 "선한 의도" 즉 "사랑"으로 해야 하며,
과정의 최선이 따라야한다.
가짜 권위에 현혹 되어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권위의 진위를 반드시 살펴야 한다.
희생하지 않는 사랑은 가짜이며, 사랑하지 않는 권위도 가짜다.